조선 시대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 4 옛 기록에 나타난 독도 < 고등학교 독도 바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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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앞 시기로 갈수록 추정치의 편차가 큰 까닭은 1925년의 간이 국세조사 결과 파악된 총인구수 1902만 30명을 기준으로 연구마다 각기 변수를 달리 설정하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계산한 데에 있다.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은 통감부를 두고 이토 히로부미주60를 통감으로 임명하여 외교를 한다는 구실로 대한제국의 내정 전체를 관리하였다. 나아가 많은 국민이 의병 활동을 통해 저항하였고, 지식인들의 애국계몽운동도 전개되었다. 경제에서도 재정 일원화와 도량형 통일 등 중요한 개혁이 있었으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토지제도의 개혁은 없었고, 특히 주권을 지키기 위한 개혁은 거의 없었다. 이어서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이 개혁에 개입하여 일본이 식민지로 조선을 지배할 때 필요한 제도 변화도 포함하게 되었고, 내각도 친일 인사들로 교체되었다. 김옥균 등은 청이 베트남을 침공하여 청불전쟁으로 번지자, 자신들이 조선에 있는 일본군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도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다.


민화는 대부분 채색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는데 대체로 대담하게 단순화되고 도안화된 표현,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미적 효과 등이 돋보인다. 그래서 민화에서는 일반 정통 회화에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해학과 멋을 볼 수 있다. 17세기 말 김만중이 쓴 「구운몽」은 18~19세기에 유행한 환몽소설의 전범이 되었다. 「 구운기」, 「 옥선몽」, 「 옥루몽」, 「 임호은전」 등이 그것이다. 이들 환몽소설에서 몽중세계에 해당하는 세속적 삶의 이야기는 영웅소설의 유형적 특질에 근접하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이 신선이었던 전생에 죄를 지어 인간세계로 오게 되었다는 구조도 그렇고, 영웅적 주인공의 다채로운 군담과 그 과정에서 맺어지는 여성 등장인물들과의 결연이 특히 그러하다.


방각본은 출판비 부담 때문에 분량이 많은 작품들을 피하고 소품종 다량생산이 가능한 소설들을 선호하였다. 반면에 세책가는 대작을 환영하고 다양한 작품들을 수집하여 유통시키는 쪽으로 기여하였다. 수십 책에서 200여 책에 이르는 규모의 대작소설들이 조선왕조 말기의 궁중장서에서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서울지방의 세책가를 통해 궁인들의 읽을거리로 납품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런 점에서 세책가는 기존 소설작품의 유통에만 상보적으로 기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소설 취향을 확산시키고 그에 부응하는 작품들이 보다 많이 출현하도록 하는 데에도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주가 농경지는 있으나 농사지을 노비가 부족하거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하였던 것이 병작(竝作)이었다. 병작제는 양인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고 생산물의 반을 거두어가는 방식으로, 생산물 지대이자 정율(定率) 지대를 걷는 제도였다.


망전산 봉수는 순흥도호부 혁파 후 풍기군 관할로 이속되었던 것이다. 또 『재향지(梓鄕誌)』에는 순흥도호부에 사랑당(沙郞堂) 봉수, 『여지도서』 영천군 편에는 창팔래산(昌八來山) 봉수가 새롭게 확인되는데, 두 곳 모두 임진왜란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외모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 세종대왕은 철저한 외모지상주의 면접체계인 삼간택(三揀擇)이라는 선발규정을 만들었고 이후 조선시대 세자빈, 왕후 선발의 모범이 됐다. 이렇게 뽑힌 순빈 봉씨는 외모는 괜찮았지만 술버릇이 좋지 못했고 음주가무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문종은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유학자로 부인의 음주가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금세 둘 사이는 멀어졌다.


난전 중에는 보잘것없는 상인이 많았지만, 더러는 시전 상인과 맞설만한 부상도 있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은 대동법의 실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수공업자와 공인과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수공업의 생산 의욕을 크게 자극, 수공업계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공장의 일부는 아직도 관아에 예속된 임금기술자로 남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 대다수는 자유수공업자가 되어 상업자본가에게 임금기술자로 고용되거나 독자적인 수공업자가 되어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대한국은 13년만인 1910년 7월 일본에 강제 합병됨으로써 끝났으나, ‘대한’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국호로 이어졌다. 1392년 음력 7월 이성계가 새 왕조의 첫 군주로 즉위하였으나, 국호는 그대로 고려라 하였다. 고구려에서 비롯된 오랜 전통의 고려라는 이름을 새 왕조가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성계와 건국 주도세력은 1392년 11월 명(明)이 새 국호가 무엇인지 빨리 알리라고 요구하자, 그때야 비로소 신하들을 모아 의논하여 조선을 새 국호로 정하였다.


이조 전랑 자대제는 문반 당하관의 인사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관직자가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여 사실상 왕권에 대해 자율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하는 관행이었다. 여기에는 이조 전랑이 사림의 공론을 반영한다는 명분이 깔려 있었다. 이에 더해 삼사 관원을 임명할 때의 천거권도 이조 전랑이 행사하게 됨으로써 사림정치의 자율적 재생산과 정화 기능이 작동하게 되었다. 이로써 문무 고관이 합의제를 바탕으로 국정을 주도하는 비변사와 이조 전랑의 자대제 및 통청권의 연계 위에 작동하는 사림정치가 상호 견제하는 구도가 유지되었다. 조선의 정치 기구는 의정부에서 육조, 육조의 속사(屬司)와 속아문(屬衙門)으로 이어지는 행정 담당 관서가 중심축을 이루고, 국왕과 직접 연결되는 주요 관서가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 기구의 배치 구조는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정립되었다.


호구 조사의 주목적인 장정 파악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1413~1416년(태종 13~16)에는 호패법주11도 시행하였다. 인구 증가와 감소는 다른 전근대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출생률보다는 주로 사망률에 따라 결정되었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높았으나, 대체로 출생률이 사망률보다 조금 더 높아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다만 16, 17세기를 중심으로 날씨가 추웠던 해가 많았고, 그 결과 기근과 전염병이 유행한 때도 많아 인구감소가 자주 일어났다.


조선의 국왕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고 할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 정통성을 갖추고 즉위하였으면 꽤 강력하게 국가를 지배할 수 있었다.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다 결국 주권을 잃어 극동의 폴란드라는 이름을 얻었던 대한제국 시기에도 고종 황제의 지위와 권력은 초빙되어 재위하던 폴란드 국왕과 비교하면 매우 탄탄하고 강력하였다. 행정과 입법, 사법 모두에서 국왕 또는 황제가 최종 권한을 행사하였고, 주요 정책과 관직 인사에 대한 최종 결정권도 행사하였다. 왕정체제 속에서 크게 확대된 정치세력을 대표하여 사림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일은 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정치행태였다. 유생들은 양반층만이 아니라 서민의 의사까지 대변한다고 자부하였고, 사림세력은 유생들의 공론을 대변한다고 자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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